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흐르면 큰 충격으로 남아있는 기억의 편린들을 제외하고 과거 대부분의
기억들을 잊어버리며 오늘을 살아간다.
그 조금 남아있는 기억들 마저도 의식적으로 재인식 시켜 주시 않으면 곧 잊혀진다.
망각이란 얼핏 생각하면 긍정적인 의미 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과거에 집착하고 또 얽매이다보면 내일의 발전을 기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생각할 땐 망각 역시 인간에게 꼭 필요한 기능임에 틀림 없다.
특히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에게 있어서의 망각은 일반인들의 살기 위한 잊음이 아니라
창작을 위한 망각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눈은 잠드는 시간을 제외하고 한시라도 피사체를 떠날수 없고
그 눈을 통해 두뇌에서 이루어지는 기억의 80%를 전달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한다.
반면 인간의 두뇌는 보고, 듣고, 느끼는 현상의 대부분을 일주일도 기억하지 못하고 메모리에서 지우고
늘 새로운 이미지를 기억한다.
사진의 매력은 눈으로 인식되고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영상들을 필름에 영원히 고정시키는데 있다.
오래된 술과 잘 삭은 김치가 맛이 있듯, 오래된 사진일수록 끌리는 맛이 있으며,
기록적인 사진은 작품성을 논하기 이전에 묘햔 향수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물론 현대 사진이 이러한 기록성의 바탕위에 창작성이 가미된 새로운 이미지를 요구하지만
기록성은 사진이 갖는 큰 매력임에는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진에 관삼을 갖고 카메라를 구입하여 사진에 흥미와 재능을 발견할 시기가 되면
마약처럼 사진세계에 한없이 빨려들어 가는 것을 느끼게된다.
당구를 처음 배울 때 가만히 누워있으면 천정이 쿠션 연습장으로 연상되듯,
모든 사물은 가로, 세로로 트리밍해서 사진의 연장선상에서 보게 되고,
어쩌다 촬영을 쉬게 되는 휴일이면 알코올 중독자처럼 검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낀다.
한마디로 사진이 주는 매력은 화려하다 못해 위대하다.
그러나 영원한 건 없듯이 짜릿한 쾌감도 잠깐이다.
쉽게만 느껴지고 모든것이 다 이루어질 것 같던 사진이 어느날 큰 벽으로 다가서는 것을 느끼는 때가 온다.
즉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와 좌절감을 느끼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창작력의 한계에서 오는 공허감이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든 것을 아쉬워하기 보다는 재료 살 돈이 부족함을 더욱 안타까워하며,
고통스런 작업에 동참하고 희열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심성에 자기실현의 욕구가 있기 때문이고,
예술가에게 자기실현을 충족시켜주는 도구는 다름이아닌 창작이다.
"예술은 답이 없다."
그 말은 창작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의미로 재 해석할 수 있다.
어떤 시를 쓰는 사람은 조용한 새벽에 일어나 맑은 정신에 글을 많이 쓰며,
새로운 글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만사를 제쳐두고 의식을 비울 때까지 잠만 잔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 즉, 과거의 기억들로 가득찬 머리에서는 새로운 착상을 할 수 없기에
글 쓰기의 첫째 조건으로 머리 비우기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금방한 일을 뒤돌아서 잊어버리는 건망증이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많다는 사실이 통계학적으로 증명되었다.
무언가를 비운다는 것은 새로운것을 받아들이는 공간이 비어 있음을 뜻하기에
"건망증이 바로창작성"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술은 창작의 고통을 잉태하면서 탄생되듯,
창작성은 꾸준히 반복 훈련을 하지 않으면
쉽게 얻어질 수 없는 후천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카메라의 기능 숙달과 기본적인 상식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평준화되지만
창작과 응용능력은 평생동안 연마해도 평준화될 수 없다.
사진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오르면 처음 사진을 배울때의 적극성은 없어지고,
갖고 있는 지식에 안주해 버리며 가슴속에는 '중견사진작가'라는 거만한 의식만이 가득차 있다.
창작을 위해 몰입해도 부족한 시기에 카메라 기능과 컬렉션에 관심의 대부분을 집중한다.
이 시기가 그 사람의 사진 한계를 규정해 주는, 어쩌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시기인지도 모르면서...
현실안주는 후퇴를 의미한다.
나보다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사람, 그 사람은 현재 나보다 더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록성이 중시되는 근대사진에서 창작적인 예술성이 강조되는 현대사진으로 넘어오면서
사진은 사람들에게 소재의 빈곤에서오는 고통 외에 창작의 고통을 추가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창작이 중요시되는 시기에 인간의 망각이 주는 의미와,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과의 사이를
건망증이라는 물음표로 던져보는 것은 어떨지... | |
